최정규, <이타적 인간의 출현>

서바이벌 게임, "나는 이타주의자다"

삼백여 일을 크레인 위에서 농성한 김진숙씨를 두고, 정부와 자본가들은 마치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짓인양 비난했는데 실상 그 말은 맞긴 하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전제는 모든 인간이 '이기적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아닌가? 모두가 자기 이익을 중심에 두고 행동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 그 행동을 조절하여 최적의 결정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진숙은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 크레인 위에 올라갔나? 그가 요구한 대로 정리해고가 철회되어봐야 자신이 복직하는 건 아니다. 설마 그저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 쌩고생을 한 것도 아닐 게다. 그렇다면, 아무런 사적 이익이 없는데도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의 존재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라 볼 수 있다. 전혀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선 무대에다 도시락 폭탄을 던진 셈이다.

굳이 김진숙이 아니어도,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가설(진리라고 믿어지는)을 의심케 할 증거들은 도처에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대가 없이 베푼다. 거액의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는 독지가도 있다. 나중에 정치에 입문할 때 경력이 될 거란 생각이 아니라, 정말로 '민중'을 위해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에 나선 이들도 있다. 우리는 누가 보지 않는데 헌혈차에 오르기도 한다. 헌혈증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 없다고 나중에 수혈할 때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뭐야,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다는 거군. 이렇게 이해하면 사실 단순한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이기적 행위는 '우월 전략'이다.(이 책은 게임 이론으로 이타적-이기적 행위를 설명한다) "니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라는 말이 연애할 때는 가끔 날려줘야 할 멘트지만, 생명체로서 그런 멘트를 일삼다간 생존이 불투명해진다. 다음 번엔 상대 역시 내가 먹는 것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봐준다는 보장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상대가 그럴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확실한 미래에 생존하려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연 선택'에 분명 유리하다. 그렇다면,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이타적 행위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자기보다(최소한 자기만큼) 남을 생각하는 개체란 '아름답긴 해도' 애저녁에 멸종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타주의자들은 끈덕지게 버티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과정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러 가설로 설명하고 있다. 주류 경제학이 손 든 주제를 경제학+인류학+생물학이 함께 풀어가는 것이다.



이타주의의 진화를 설명하는 가설들

가장 대표적인 가설은 '혈연 선택'과 '반복-상호성' 가설이다. 혈연 선택이란 자신의 유전자를 공유한 개체를 위해 희생하여, 그 유전자가 널리 퍼지게 만드는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대로, 유전자의 눈으로 보자면 우리 각자는 유전자의 전달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에게 구명대를 건네 주고 스스로는 물에 빠지는 엄마나, 개미 집단의 번성을 위해 자신은 평생 천정에 매달려 동료에게 즙을 나눠주는 '꿀단지개미'의 이타성은 이걸로 설명된다.



반복-상호성이란 오랫동안 '게임'을 반복할 경우, 내가 협조하면 상대도 나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내가 배신하면 상대도 내게 배신하리라는 기대가 행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가게의 '단골'이 되면 정직한 서비스를 어느 정도 기대한다. 단골을 속였다간 우리가 소문을 내서 영업에 차질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을 'TFT' 라고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협조에는 협조, 배신에는 배신)'다.

그러나 우리는 가까운 혈족이 아닌 경우에도, 혹은 다시 만나지 않을 경우에도 이타적 행위를 한다. 나는 가끔 길에서 "차비가 없어서 그러니 천원만 달라"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돈을 준다. 평생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이처럼 협조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이기적인 사람의 '봉'으로 살다 밀려나야 할 텐데 꼭 그렇진 않다.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타적인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자신을 보호하며(유유상종 가설), 자주 대화를 나눌수록 이타성의 빈도는 증가한다.(의사소통 가설) 또, 개인으로는 이기주의자가 득세할 지라도 집단으로는 이타주의자가 많은 집단이 성공한다. '금모으기 운동' 같은 걸 팔 걷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의 경쟁력이 강하지 않겠는가. (집단선택 가설) 집단 내부에 부동산보유세 같은 '제도'를 잘 만들어 이기적 행위자에게 돌아갈 몫을 줄이는 것도 이타적 행위를 보호하는 일이 된다. 이런 과정들 덕분에 지금 인류는 '만인을 향한 만인의 전쟁'이 아니라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모양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최적화한 체제가 아니라, 이타적 본성의 진화를 가로막는 최악의 체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85호 크레인'이 상징하는 것처럼 수백만 년의 진화로 형성된 이타적 능력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쉽게 소멸되지 않으며, 도리어 자본주의를 내파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한 가지만 더. 그렇다고 'Only 이타주의'가 늘 좋은 것이냐 하면 꼭 그렇진 않다. '표류의 문제'가 있다. 가령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을 가진 사람들의 섬에 '언제나 협조만 하는 사람들'이 표류해올 경우, 이들 사이엔 배신이 나오지 않으므로 점차 섬은 협조만 하는 '착한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나중에 외부에서 '언제나 배신만 하는 사람들'이 들어올 경우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배신만 하는 사람들은 협조만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기므로, 그 집단의 유지가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의심과 배신자 응징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면역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유명한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의 말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게임 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수학자 존 내시의 이야기다.

그는 비범한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당한다.